2017/08/29
창덕궁 후원
존덕정이라는 정자에
정조가 쓴 글이 있다.
재위 22년,
세상을 떠나기 2년전인 1798년,
47세의 정조가 쓴 글이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가끔씩 어떤 글에서는
글쓴이의 생각과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마치 정조가 정자에 앉아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말로 큰 행복감이다!
리더십,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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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천명월주인옹 자서
(萬川明月主人翁 自序)
나는 물과 달을 보고서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우친 바 있다.
달은 하나 뿐이고
물의 숫자는 1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 되므로
시냇물이 1만 개면
달 역시 1만 개가 된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고
무리지어 쫓아다니며
가는 것인지 오는 것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모양이 얼굴빛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다른 자가 있는가 하며
트인 자, 막힌 자,
강한 자, 유한 자,
바보같이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고 얕은 자,
용감한 자,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 교활한 자,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
모난 자, 원만한 자,
활달한 자,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
말을 아끼는 자,
말재주를 부리는 자,
엄하고 드센 자,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속에만 주력하는 자 등등
그 유형을 나누자면
천 가지 백 가지일 것이다.
내가 처음에는
그들 모두를
내 마음으로 미루어도 보고
일부러 믿어도 보고,
또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기도 하고
일을 맡겨 단련도 시켜 보고,
혹은 흥기시키고
혹은 진작시키고 규제하여
바르게도 하고,
굽은 자는 교정하여
바로잡고 곧게 하면서
그 숱한 과정에서
피곤함을 느껴온 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다.
근래 와서 다행히도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또 사람은
각자 생김새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이치도 터득했다.
그리하여 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 학대로 살게 하여
그 천태만상을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데 쓴 것이다.
그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고,
선한 점은 드러내고
나쁜 점은 숨겨주며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뒷전으로 하여
규모가 큰 자는 진출시키고
협소한 자는 포용하고
재주보다는 뜻을 더 중히 여겨
양쪽 끝을 잡고
거기에서 가운데를 택했다.
트인 자를 대할 때는
규모가 크면서도
주밀한 방법을 이용하고
막힌 자는
여유를 두고 너그럽게 대하며
강한 자는 유하게
유한 자는 강하게 대하고
바보 같은 자는 밝게
어리석은 자는 조리있게 대하며
소견이 좁은 자는 넓게
얕은 자는 깊게 대한다.
용감한 자에게는
방패와 도끼를 쓰고
겁이 많은 자에게는
창과 갑옷을 쓰며
총명한 자는 차분하게
교활한 자는 강직하게 대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게 하는 것은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를
대하는 방법이고
희석하지 않은
순주를 마시게 하는 것은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그런 자를 대하는 방법이며
모난 자는 둥글게
원만한 자는 모나게 대하고
활달한 자에게는
나의 깊이있는 면을 보여주고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면을 보여준다.
말을 아끼는 자에게는
실천에 더욱 노력하도록 하고
말재주를 부리는 자는
되도록 종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며
엄하고 드센 자는
산과 못처럼 포용성 있게 제어하고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는
포근하게 감싸주며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내실을 기하도록 권하고
실속만 차리는 자는
달관하도록 면려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 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은 것과 같다.
달은 각기 그 형태에 따라
비춰줄 뿐이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거기에서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이
만천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머무는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내 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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