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즐거움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1. 22. 09:55


어제는
마침 읽을 책이 다 떨어져
모처럼 목동 교보문고에 갔다.

그런데 서점을 두바퀴나 돌아도
도대체 읽을 책이 없었다.
세상이 변한 것인지
출판업계가 이상해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읽을 책이 없었다.

경제경영자기계발 서적이
너무나 넘치는 가운데
에세이들은 참으로 가볍고
마음을 위로하겠다고 나오는 책들
역시 깊이가 없었다.

이제 정말
소설이나 시 밖에 없는 것인가
하고 그쪽을 둘러봐도
자극적인 소설들과
가벼운 시 밖에 없었다.

그러다 겨우겨우
어이없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하고
고른 책 중 하나가 이 책이다.

한강씨의 소설은
언제나 참 차분하고 섬세하다.
그런데
그 차분함과 섬세함은
정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차분함과 섬세함으로
격정과 감동을 만들어 내니
한강씨가 대단한 작가임은
정말이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작가의 섬세한 마음으로 포착해서
아프게 정리한 소설인데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아픔에 공감하게 되고
마음이 매우 슬프게 무거워진다.

작별하지 않는다,
절대 작별하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그런 뜻으로 읽힌다.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한강씨의 아름다운 문장들은
몇개는 꼭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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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난 사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살고 싶어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나오는 몸.

아름답지만,
그걸 느낄 수 잇는
내 안의 전극이 죽었거나
거의 끊어졌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그런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그럼... 그래야지... 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해내는 것은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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