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예전에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소설집을
조금 읽다가
큰 끌림이 없어 밀어 두었었는데
(다행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축적이 있었던 것인지
어떤 고통과
그 고통에 따른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너무나 섬세하고 공감가는 글을 쓴다.
요즘의 내 감정이
최은영 작가의 문장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멋진 책을 만난다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난 기쁨이다.
최은영 작가의 글을 읽으며
한동안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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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도 마음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을
타인처럼 여기고 있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심했고
더 나아가 무정하기까지 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몫)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일년)
그런 그녀를 보며
입사초기 자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회사사람들에게
애써 최선을 다하려 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 뒤의 낙담을.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러나 그후에도 그녀는
잠들지 못하거나
질이 낮은 잠을 끊어자며
아침을 맞았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폭음을 하고는
환한 대낮의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은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잠근다.
(답신)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고
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때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우리의 관계는
그래서 아주 단순했다.
나는 너를 좋아했고,
너도 나를 좋아했지.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아쉬운
사이였어.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 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더 알고 싶은 것도,
더 해보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이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그런데도 살아야 한다고
자꾸만 누군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지.
내가 너를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그 순간이었어.
내가 영원히
너에게 다다를 수 없는
타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었지.
그 순간에도
너의 세계에서 나는 빠른 속도로
지워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래도, 그래도......
(파종)
민주야
응
너 힘든거, 나 줘...... 가지고 갈게
그녀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
그는 그녀의 마음이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자기 손 위에
그녀의 이야기를
올려달라는 듯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 힘겨워도
의미가 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그가
삶을 원했다.
살며 어떤 것에도
특별히 욕심을 내지 않았던 그가
살고 싶어했다.
(이모에게)
내가 거듭해서
이모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결국 비슷한 주름을 얼굴에 새기면서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만
늘어가는 인간이 될까봐,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시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될까봐
겁이 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방화문을 닫듯이
마음을 닫아버리면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의 불길로부터 안전했다.
하지만 그해 봄에는
그 문이 더는 내 힘으로
닫히지 않았다.
슬프다거나 괴롭다는 감정보다도
내 마음 하나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먼저 일었다.
그러자 이모는 뜬금없이
내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
저 너머 누군가의 눈빛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 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작가의 말)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나는 사랑을 하는 일에도
받는 일에도
재주가 없었지만
언제나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실 언제나 내가 바라온 건
그것 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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