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즐거움

>>>>> 2025. 1. 7. 15:01

 

2025년 새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그 책의 제목이 "흰"이라는 것이 참 좋다.

흰색 도화지가 생각나기도 하고
흰 눈이 생각나기도 하고
뭔가 새해 겨울... 이런 것들과 어울려서 그런 것 같다.
책 제목처럼
책 디자인도 표지 색상도 아주 희고 여리다.

이런 제목과 이런 주제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한강 작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강 작가의 시집을 읽은 다음
이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신기하게도 소설이 시처럼 읽힌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어보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부터
시작하라고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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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깨달았다.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 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
아니 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 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있을 때.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될 사람이 아닌 것처람.
부서져 본 적 없는 사람처람.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 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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